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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도시를 떠나 농촌에서의 삶을 꿈꾸는 분들 많을 텐데요. 한동안 줄었던 귀농행렬이 최근 다시 늘고 있습니다. 귀농에 실패해 도시로 돌아가는 이들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귀농이 쉽지 않은 선택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귀농의 꿈을 꾸고 있거나 이미 농촌에 둥지를 튼 이들을 통해 귀농인들이 겪는 현실과 그 대안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소나무를 깎고, 다듬는 손길이 분주합니다. 초보 목수들이지만, 저마다 한옥을 짓는 데 필요한 목재를 마름질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강원도의 한 자치단체가 5년 전 설립한 한옥학교. 목공 기술을 배워 취업하거나, 농촌에 정착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한쪽에선 수강생들이 처음으로 직접 한옥을 짓고 있습니다. 서까래를 올리는 이들 사이에서함께 일을 하고 있는 29살 김홍순 씨. 다니던 설계회사를 그만두고 넉 달 전 이곳을 찾았습니다. 김 씨는 2,3년 정도 한옥 일을 배운 뒤 손수 한옥을 지어 농촌에서 꿈을 펼칠 계획입니다. <인터뷰> 김홍순 (한옥학교 수강생) : '귀농을 해서 농사만으로 저의 지출을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지출이 많이 들어가는 제 집을 제 손으로 지으면 타산이 맞을 것 같아서...' 지난 5년 동안 이곳을 거쳐간 졸업생만 4백여 명. 그 가운데 상당수가 인근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인터뷰> 장동욱 (한옥학교 수강생) : “텃밭이 한 2400평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농사도 지금 현재도 짓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어서 거기에서 생산해서 자급자족할 생각입니다.” 실제로 지난 97년 외환위기 직후 반짝 늘었다 줄었던 귀농 인구가 최근 다시 늘고 있습니다. 특히 과거엔 실직 등의 이유로 생계형 귀농이 많았다면, 최근엔 농촌의 여유로움을 즐기거나 사업 가능성 때문에 택하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모내기가 한창인 남도의 들녘. 뙤약볕 아래에서 김은종 씨가 이웃의 일을 거들고 있습니다. 시민단체 일을 하다 4년 전 선택의 여지가 없어 농촌으로 들어왔다는 그는, 취재진이 찾았을 때에도 단내가 날만큼 바삐 뛰어다녔습니다. 주변의 땅 4헥타르를 임대해 단 돈 천 만원으로 시작한 농사. 그러나 2년 동안 감자와 콩, 고추 등 손을 댄 작물마다 쓰디 쓴 실패를 맛봐야 했습니다. 아예 풀밭으로 변하거나, 병해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수익은커녕 귀농 첫 해에만 천 만원의 빚을 졌습니다. <인터뷰> 김은종 (전남 순천시 낙안면) : “농사를 짓는데 하는 농사마다 잘 안 되고 수입도 안 되고 하니까/ 이걸 내가 계속 해야 되나 정말 막막하더라고요. 지금도 모든 게 해소된 건 아닌데... 농사 경험이 전혀 없어 언제 어떻게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 게다가 친환경 농법을 고수했기에 그 어려움은 훨씬 더 컸습니다. '고생 좀 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가 현실의 벽에 가로막히자, 그는 틈날 때마다 주위에 묻거나 영농교육을 받으러 다녔습니다. 이제야 농사를 이해하게 됐다는 김 씨. 지난해부터 조금씩 사정이 나아져 내년엔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정착할 생각입니다. <인터뷰> 김은종 (전남 순천시 낙안면) : “아무리 준비하더라도 농사경험 자체가 없고 그러다 보니까 3,4년 정도는 기본적으로 고생한다 투자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 재정적 준비도 같이 갖춰서 시작하면 더 좋지 않을까. 그것 없이 어떤 낭만성 그렇게 해서 좌절해서 떠나신 분들도 많이 봤거든요.”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한 농가. 서울의 한 유명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던 46살 김경구 씨는 6년 전 귀농의 꿈을 이뤘습니다. 재산을 정리한 돈 3억 원은 땅을 사고 집을 짓는데 모두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땅을 구입하는 것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인터뷰> 김경구 (경남 하동군 악양면) : “'시골살이'에 대해서 전혀 몰랐기 때문에 집 자리 잡거나 논 자리 잡을 때 지질도 모르고, 집 자리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고 금전적인 시행착오가 있었죠. 땅을 두세 번 집 자리 찾느라고 산 게 있고요.” 김 씨는 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바랐지만, 농사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됐고 매출도 한해에 수백만 원에 불과했습니다. 때문에 지금은 주말마다 인근 지역에서 강의를 하며 오히려 더 많은 수입을 얻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경구 (경남 하동군 악양면) : “농사만 전업으로 지어서 수입을 얻어서 생활하겠다는 건 꿈일 것 같아요. 농사 외 수익을 얻어서 거기에서 플러스 알파로 농사수익을 덧붙여서 생각하겠다 하면 현실성 있어도..” 어스름이 내려앉은 초저녁. 시골 농가에서 사진 강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이도, 듣는 이들도 대부분 인근 지역에 사는 농민들입니다. 귀농 10년차인 이창수 씨. 스스로 '실패한 농사꾼'이라 칭하는 그가 얼마 전 주위 예술인들과 함께 만든 지리산 학교.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그저 평범한 가정집입니다. 이곳에서 매일 진행되는 도자기와 수공예 등의 강좌는 지역민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며 교류하는 소통의 장이 됐습니다. <인터뷰> 이창수 (지리산 학교 교장) : “끊임없이 지역 안에서 지역민으로서 같이 접촉하고 교류하고 그들과 같이 얘기 나누고 그래야 된다. 왜냐하면 어쨌든 도회지적 삶과 시골적 삶은 여기는 열려 있거든요. 열려 있는 곳에서 내가 닫기 시작하면 못 버텨요.” 계절을 달리하며 녹차와 매실, 감 농사를 짓는 이 씨. 10년 새 능숙한 일꾼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는 본격적인 귀농에 앞서 1년 넘게 셋집을 얻어 생활했고, 그 뒤엔 마을에서 주민들과 부대끼며 살아왔습니다. 이젠 생활비를 농사로 얻은 수익으로 해결한다는 그는 주변의 농민들이야말로 훌륭한 스승이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이창수 (지리산 학교 교장) : “1년 2년 3년 이렇게 되는 걸 한 살 두 살 세 살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 천천히 가자. 그래서 조금 조금씩 주변 주민들한테도 이야기 듣고 그리고 스스로 마음가짐으로 배우려고 하는 자세. 그리고 낮추려는 자세...” 최근에 귀농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이와 관련한 교육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정부 지원으로 한 대학에서 이뤄진 귀농준비교육의 일일 강사로 나선 46살 이수찬 씨. 12년 전 농촌 행을 택한 이 씨는 각종 약초를 재배해 매년 1억 원이 넘는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는 가공시설까지 갖추고, 인터넷과 직거래 장터 등을 통해 유통비를 최소화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 씨 역시 젊은 시절 준비 없이 덤볐다 귀농에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또, 귀농 초기엔 판로가 마땅치 않아 여러 차례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이수찬 (양지농산 대표) : “(초기엔 가공사업 잘 안되니까)고물상도 하면서 생활비도 벌고 그렇게 몇 년 유지해오며 가공사업 어느 정도 단계가 되면서 고물상은 안 하고 이쪽에 전념하고 있죠.” 농촌행을 결심하고 귀농 교육을 받고 있는 이들 가운데엔 2,30대도 적지 않습니다. 농장을 꼼꼼히 둘러보는 안용표, 강두미 씨 부부도 지역과 재배 작물을 저울질하며 현장 실습에 참여했습니다. <인터뷰> 안용표-강두미 (귀농희망자) : “좀 자주적인 생각 갖고 본인이 스스로 결정하고 그렇게 내리는 삶을 살고 싶다란 생각에서 시작했고요. 지금 그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알아보고자 해서.” 지난해에만 90여 명이 귀농해 '귀농 1번지'로 꼽히는 전북 진안. 43살 김오수 씨는 2년 전부터 마을 개발사업을 담당하는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대도시에서의 직장생활과 식당을 운영한 경험을 살린 겁니다. 일종의 사회적 일자리로, 이 지역에만 마을 간사와 조사단 등 40여 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오수 (전북 진안군 동향면) : “저한테는 준비 기간이라고 볼 수 있죠. 이 지역의 농촌에서 살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준비를 하고 있는 그런 탐색전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지역에서 무엇을 할 것이다 고민을 해야지 만이 뭔가 찾아가면서 일을 할 수 있지. 그냥 내려가서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오신다면 굉장히 힘들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아이들의 교육 문제와 도시에 대한 염증으로 택한 귀농. 수입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지만, 김 씨 뿐만 아니라 가족들 모두 이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근영 (동향초등학교 4학년) : “(예전엔) 집에만 있었는데, 여기 와서는 이웃과 친구들이 많아서 밖에 나가서 뛰어 놀 수 있는 게 제일 좋아요.” 이들이 사는 마을은 지난해부터 귀농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해 지금은 28세대로 늘어난 곳입니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도시의 삶을 접거나 접으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을의 모든 일은 주민자치회의를 통해 결정하고, 11가구는 아직은 서툴지만 논밭을 마련해 공동경작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성여경 (전 귀농운동본부 사무처장) : “농촌의 현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농업부터 하면 실패할 확률도 많고,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하지만, 자기가 하던 일을 가지고 농촌으로 들어간다면 그럴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 있다면 도시 분들이 농촌으로 와서사시는 정착하는 게 훨씬 쉽죠.” 귀농은 성공하기보단 실패하기 더 쉽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여전히 귀농에 대해 환상을 갖고 너무 쉽게 보는 풍토가 팽배하단 겁니다. 집과 논밭을 어떻게 구하고, 농산물 품목은 무엇으로 할 건지. 또 생산된 작물은 어떻게 판매할 것인지 등에 대해 모든 준비가 마련돼야 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인터뷰> 박천창 (무진장 좋은마을 네트워크 대표) : “실질적으로 와서 6개월이고 1년이고 살아보면서 내가 필요한 땅이 어떠한 땅인지 집이 어떠한 공간인지, 그 집의 형태는 어떻게 할 건지. 에너지 문제는 어떻게 할 건지 남향으로 할건지 여러가지 일들을 생각을 해야 되거든요.” 귀농인들이 겪는 또 다른 어려움은 도시와 농촌의 문화적 차이입니다. 때문에 지역 주민들을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노력도 절실합니다. <인터뷰> 채상헌 (천암연암대 귀농지원센터장) : “잘 정비된 하천, 농로 이런 것들. 그 마을 사람들이나 선조들이 기부하거나 부역해서 만들어놓은 거거든요. 농민들은 그걸 딱 꼬집어서 뭐라 이야기하지 않지만 사실 어떤 면에서 봤을 때 무임승차다. 그래서 귀농하시는 분들이 농촌사회 잘 이해하고 거기에 깃드는 마음 자세가 중요한 것 같아요.” 도시민들의 귀농은 '사회적 이민'으로 표현됩니다. 귀농자들의 노력뿐 아니라, 정부나 지자체 등이 이들의 입장에서 함께 고민하고 지원책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