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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려고 했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가 그나마 살아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한 통의 제보가 왔습니다. 그래도 내 딸은 살아있어 증언이라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딸이 살아남아 다행이라 말하는 곳, 남들은 평생 직장이라 부르는 공기업이었습니다.

■한 엄마의 제보…"공기업 입사가 비극 됐다"

제보자는 공공기관에서 인턴으로 일하다 정규직이 된 고졸 취업생의 어머니였습니다. 한국투자공사에서 입사 3년 만에 극단적 선택을 한 고졸 출신 20대 직원의 사연을 보도한 KBS의 기사를 접한 뒤 제보를 결심했다고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직원의 경우 지난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됐는데 근로복지공단은 석사 채용자가 해야 할 업무를 이 고졸 직원에게 맡겨 압박감이 심했고, 나이와 학력 차별 정황까지 의심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같은 고졸 직원 차별이 다른 공기업에서도 있었다는 제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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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싶었는데…짐 같은 존재"

6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립공원공단 인턴이 된 김 모 씨. 컴퓨터나 회계 관련 자격증 등을 10개 정도를 갖고 있고, 국가직무능력표준(NCS)시험도 봤습니다. 결국 66대의 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두 달 만에 능력을 인정받아 정규직이 됐고, 18살 나이에 원하던 곳에 입사한 김 씨는 언젠가는 국립공원의 소장이 되겠다는 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처음 발령받은 사업 부서에서 주어진 업무량은 다른 직원의 20% 정도, 그것도 대부분 자원봉사와 캠페인 일만 돌아왔습니다. 컴퓨터나 회계 관련 각종 자격증은 써보지도 못했습니다.

"열심히 해도 티도 안나서 성과라고 말하기 어려운 일만 주는 거에요. 업무 분장을 딱 보면 저는 정말 일을 안하는 것처럼 보여지고 회사에서 제한을 거는 느낌이었어요. 넌 여기까지."

김 씨는 자신은 동료 직원이 아니라, '짐 같은 존재'였다고 표현했습니다.

■ "회의에도 부르지 않고, 호칭도 불러주지 않고"

그래도 김 씨는 연차가 쌓일수록 성과를 내고 싶었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성과를 모두 달성해 사내 표창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업무 회의도 자신만 빼고 진행되는 일이 반복됐다고 털어놨습니다. 김 씨는 자신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대졸 직원들은 나이가 어린 자신을 '주임'이라고 부르지 않고 '야'라고 부르는 게 일상이었지만, 상사 중 누구 하나 말리지 않았다는 게 김 씨의 주장입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차별이 김 씨에겐 눈에 띄는 폭언이나 폭행과 같은 괴롭힘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욕을 하고 때려야 그것만 따돌림이 아니잖아요. 나를 보는 그 시선들은 증거로 담을 수가 없잖아요. 차라리 날 치고 욕하고 싸우고 사과를 하고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2년간 4번의 인사이동"

이런 일이 계속되자 휴직이나 사직하겠다는 뜻까지 여러 차례 밝혔지만, 돌아온 건 잦은 인사 발령. 김 씨는 보통 3년~5년마다 있는 인사 이동을 퇴직 전 2년 동안 4차례 겪었습니다.


김 씨는 차로 30분 이상 떨어져 있는 다른 분소로 당일 인사 발령 통보를 받기도 했고, 자주 바뀌는 동료와 업무에 적응은 더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퇴직 직전엔 야영장 청소 업무로까지 발령 나자, 입사 5년 만에 스스로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 "직장 내 괴롭힘, 성추행 의심"...해당 직원들 "사실 무근"

일부 직원들의 직장 내 괴롭힘도 의심됩니다. 김 씨는 자신이 탈의실에서 업무 복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 다른 직원이 3차례 정도 문을 열어놓고 가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본 사업장에서 분소로 발령 나고 나선 일의 특성상 2인 1조로 순찰을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는데, 이때 성추행을 당한 경험 등도 있다고 김 씨는 주장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은 직장 내 괴롭힘과 성추행 관련 조사도 진행하고 있는데, 지목된 당사자들은 모두 해당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 그러나 조사는…

회사를 나온 김 씨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아 올해 5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 재해를 인정해달라고 신청하고, 지방고용노동청에서 조사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조사는 아직 진행 중입니다.

노동청은 1차 조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과 나이, 학력 차별 정황 등에 대한 조사를 국립공원공단에 맡기고, 이 조사 결과로 갈음했습니다. 또, 직장 내 괴롭힘 처벌법이 2019년 7월 시행됐다는 이유로 그 이전에 김 씨가 겪었다고 주장한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서는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노동청이 인용한 회사의 조사 결과는 업무상 불이익이나 직장 내 괴롭힘, 성추행 등이 모두 없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공단 측은 적은 업무를 준 건 어린 나이에 적응을 어려워하는 김 씨를 배려하기 위한 차원이었고, 인사 이동 전 의사를 물었다고 밝혔습니다. 청소 업무의 경우 정당한 인력 재배치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취재가 시작되자 노동청은 국립공원 측의 자체 조사 결과가 부실하지 않냐는 지적에 대해 인정했습니다. "회사 조사 결과를 받았을 때 꼼꼼히 조사가 이뤄졌다고 보기 어려웠고,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진정인이 원할 경우, 본인들이 직접 조사에 나설 수도 있다고 해명했습니다.

국립공원 측도 해당 사건에 대해 다시 조사를 시작했다며, 목격자 등의 범위를 넓혀 더 깊이 있게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혀왔습니다.

■정규직도 대거 퇴사…왜 나오나?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을 통해 받은 자료를 보면, 국립공원공단이 2012년부터 7년간 뽑은 고졸 인턴 중 17명이 회사를 떠났습니다. 전체의 20%가 넘습니다. 이 중에 15명은 정규직 전환 뒤 퇴사했습니다. 평생직장이라는 곳에서 정규직이 되고도 대거 퇴사한 겁니다.


정부가 고졸 청년들의 어려움을 풀어주겠다며 2년 전 공공기관 고졸 채용 목표제를 도입했습니다. 2016년 5%대에 그치던 고졸 출신 채용 비중이 지난해엔 10%를 넘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고졸 채용을 늘리기 위해 일정 규모를 뽑아야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주고 있다 보니, 기관들이 일단 뽑아놓고 제대로 된 업무를 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획재정부는 기관들이 적합 업무를 만들 수 있도록 고졸 채용 가이드라인을 내려보내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8년 전에 만든 게 전부입니다.

■고졸 채용 제대로 정착하려면

고졸 채용이 필요한 제도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나라 대학진학률이 70% 정도로 주요 국가 중에 가장 높다 보니, 대학에 가지 않은 청년들이 첫 직장을 잡기까지 평균 3년 가까이 걸립니다. 물론 대졸 구직자들 역시 만만치 않은 준비를 거쳐야 하는 상황이지만, 대졸 구직자와 비교하면 3배 넘는 준비 기간이 필요한 겁니다.

제도를 정착시키려면 우선, 정부가 실적만 신경 쓰기보단 기관 특성에 따라 맞춤형 직무를 먼저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합니다. 또, 기관들은 멘토링 등을 통해 입사 이후 적응이나 경력 개발을 도울 필요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아울러 정부가 고졸 입사자 규모는 집계하지만, 근속 연수나 퇴사자가 얼마나 되는지 등은 파악하지 않는데, 인력을 뽑고 나서 제도가 잘 정착하고 있는지, 쳬계적인 사후 관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대문사진: 배동희
그래픽: 권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