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조서 꾸미기’ 수사기관 관행 제동…국가배상책임 첫 인정_베토 실바와 아데미르_krvip

대법, ‘조서 꾸미기’ 수사기관 관행 제동…국가배상책임 첫 인정_베타 물고기를 위한 수족관 만드는 법_krvip

피의자가 조사 과정에서 수사기관의 질문에 짧게 답변했음에도 마치 피의자가 길게 답변한 것처럼 피의자 신문조서를 기재한 경우, 조서를 작성한 수사기관은 직무상 의무를 위반한 것이고, 이에 따라 피의자가 입은 정신적 피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수사기관이 자의적으로 조서를 꾸며 기재할 경우 피의자가 자발적으로 구체적인 진술을 한 인상을 주게 돼 방어권 행사에 불이익을 입을 수 있다는 취지입니다.

대법원은 성폭력범죄 피의자로 입건돼 구속됐다 결국 무혐의 석방된 10대들이 자신들의 조서를 작성한 경찰을 대상으로 위자료를 청구한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을 오늘(29일) 확정했습니다.

대법원이 수사기관의 피의자 신문조서 작성 과정에서 '직무상 의무' 위반과 관련해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앞서 A씨 등 중학교 선후배 4명은 2010년 경기도 수원시에서 지적 장애가 있는 여학생을 합동해 성폭행했다는 등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소년들 중 일부는 경찰 1회 피의자신문과정에서 범행을 자백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이뤄진 문답은 범행 일시, 장소, 범행 전 행적, 범행을 공모하고 준비하게 된 과정 및 내용, 범행의 세부내용 등에 관해 경찰이 구체적으로 장문 형식의 상세한 질문을 하면 소년들이 단답형 답변(장문단답)을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면서 문답 내용을 바꾸어 마치 위 일부 소년 원고들이 자발적으로 구체적인 진술을 한 것처럼 '단문장답' 형식으로 조서를 작성했습니다.

이후 경찰에서 자백한 소년들은 진술을 철회했고, 다른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했습니다. 경찰은 소년 피의자들 모두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은 경찰이 작성한 자백진술조서를 근거로 A씨 등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그러나 검찰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 및 공범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소년 원고들이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하면서, 검찰은 소년들 전부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하고 석방했습니다.

이후 A씨 등과 그 보호자들은 법원의 구속영장 발부는 경찰의 진술조서 조작과 부실한 수사 때문이라며 재산적·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금으로 A씨 등 10대 4명에게 3천만원씩, 부모들에게 500만~1천만원씩을 지급하라는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수사기관은 수사 등 직무를 수행할 때에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공정하게 하여야 하며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법규상 또는 조리상의 의무가 있는데, 이를 지키지 않았단 겁니다.

1심 법원은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했습니다.

법원은 "경찰관이 피의자신문조서 작성과정에서 위와 같이 장문단답의 실제 신문내용을 단문장답으로 바꾸어 기재한 것은 조서의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직무상 과실에 해당한다"며 "해당 조서는 이후 영장실질심사 단계 및 검찰수사 과정에서 소년 원고들의 피의자로서의 방어권 행사에 불이익하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며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수사기관이 고의로 일부 소년 원고들의 진술을 조작한 것은 아니고, 범죄혐의를 가지고 구속영장을 청구하여 수사한 데에 과실이 있다고도 볼 수 없다며 나머지 청구는 배척했습니다.

2심 역시 마찬가지로 "소년 원고들 및 보호자 원고들에게 위와 같은 조서작성 과정에서의 직무상 과실에 따른 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으로 위자료를 일부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하고 국가의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정부는 "사법경찰관이 자백진술의 전체적인 취지 자체를 조작하지 않은 이상 피의자신문조서는 녹취록과 다른 기능을 가진 것이고, 소년 원고들이 조서의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서명·날인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질문과 답변을 바꾸어 기재한 것만으로는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며 사법경찰관의 직무상 과실이 없어 손해배상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며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원고들 역시 위자료 액수가 과다하게 적고, 압수수색 등 과정에도 과실이 존재한다며 상고했습니다.

이 사건의 쟁점은 △국가배상책임에 있어서 '법령 위반'의 의미 및 경찰관이 범죄수사를 하면서 법규상 또는 조리상의 한계를 위반한 것이 '법령 위반'인지 △어린 학생 등 사회적 약자가 피의자인 성폭력범죄를 수사하는 경찰관에게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피의자의 방어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더욱 세심하게 배려할 직무상 의무가 있는지 여부 등이었습니다.

대법원은 "국가배상책임에 있어 공무원의 가해행위는 법령을 위반한 것이어야 하고, 법령을 위반하였다 함은 엄격한 의미의 법령 위반뿐 아니라 인권존중, 권력남용금지, 신의성실과 같이 공무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준칙이나 규범을 지키지 않고 위반한 경우를 포함하여 널리 그 행위가 객관적인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며 "수사기관이 범죄수사를 하면서 지켜야 할 법규상 또는 조리상의 한계를 위반하였다면 이는 법령을 위반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봤습니다.

대법원은 또 "특히 피의자가 소년 등 사회적 약자인 경우에는 수사과정에서 방어권행사에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세심하게 배려할 직무상 의무가 있다"면서 "따라서 경찰관은 피의자의 진술을 조서화하는 과정에서 조서의 객관성을 유지하여야 하고, 고의 또는 과실로 위 직무상 의무를 위반하여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함으로써 피의자의 방어권이 실질적으로 침해되었다고 인정된다면, 국가는 그로 인하여 피의자가 입은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대법원은 이어 "성폭력범죄는 통상 객관적인 물증이 부족하여 진술증거가 중요한 사건에 해당하고, 제1회 피의자신문과정에서 자백한 경우 이후 번의하여 범행을 부인하더라도 자백진술의 신빙성을 탄핵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며, 피의자가 성년에 이르지 못한 어린 학생 등 소년인 경우 더욱 방어권 행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아울러 대법원은 "이 사건 피의자들은 소년이고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하였으나 사법경찰관이 일부 피의자들에 대한 최초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함에 있어 문답을 바꾸어 범행 전반에 관하여 자발적이고 구체적으로 진술한 것처럼 기재함으로써, 이후 소년 원고들이 수사과정에서 진술이 바뀐 이유를 납득시키고 부인진술의 신빙성이 자백진술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 등을 주장하여 방어권을 행사하는 데에 불이익하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고 봤습니다.

이번 판결은 수사기관이 조서의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 직무상 과실로 인정될 수 있고, 이에 기해 피의자에 대한 국가배상책임까지 인정될 수 있단 판결입니다. 그 동안 피의자 답변을 '꾸며온' 수사기관의 관행에 제동이 걸릴 전망입니다.